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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3일 금요일

환경과 국토 개발, 균형이 중요하다 (충남사설읽기워크북09)

'양비양시론'이란 말이 있습니다. 서로 대립하는 양쪽의 주장이나 태도를 모두 그르다고 하는 경우 '양비론', 모두 옳다고 하는 경우 '양시론'이라고 하지요. 제시문은 '양비양시론'의 모범적인(?) 사례로 보여집니다. 물론 완전한 양비론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것이, '도룡뇽 소송 사건'을 비롯해 환경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과 단체들에 대해 '개발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에서는 "무차별적인 개발은 '절대' 안된다"면서 완전한 개발주의의 속내를 감추려 합니다. 비난은 앞장서 하다가 책임에서는 한 발 쏙 빼는 식이 우리나라 언론들의 일반적인 화법을 따릅니다. 그래서 '양비양시론'이란 말은 보통 부정적인 뜻으로 쓰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편을 들지 않고 온전히 공정할 수 있을까요? 결국 '양비양시론'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객관적인양 포장하는 비겁한 방법입니다.

* 도룡뇽 소송 관련 기사

도룡뇽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60602161747&section=03

천성산 도롱뇽한테 야단맞을 고속철 터널 반대운동 (조선일보)





국민일보 사설 2011.06.07
http://news.kukinews.com/opinion/view.asp?page=&sec=&arcid=0005035393&code=11171111

국토해양부가 ‘환경지상주의’적 시각을 바로잡고, 국토 개발에 대한 이해 증진을 위해 교육 교재 편찬 및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다. 환경 보호를 내세운 일부 시민단체들이 대규모 국토 개발 국책사업에 번번이 제동을 걸면서 막대한 국고 손실을 초래하고, 사회적 갈등과 국론 분열 현상도 심화되고 있는 것을 더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라고 한다. 이 같은 국토부의 움직임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시민단체와 전교조, 일부 종교계 등의 ‘활약’에 힘입어 환경 보존은 선(善)이고 개발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횡행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국

물론 자연 보호와 환경 보존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국민 생활 개선을 위한 국토 개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아무리 청정하고 아름답게 보존한다 한들 그 자체로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한다. 하물며 개발이 반드시 환경 훼손을 불러온다고 할 수 없는데도 환경 보존을 외치며 개발을 막는 것은 ‘환경 포퓰리즘’이라 불려 마땅하다.

‘도롱뇽 소송사건’으로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던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가 그렇다. 공사가 추진될 당시 불교계와 환경단체들은 천성산에 터널을 뚫으면 도롱뇽이 멸절되는 등 생태계가 파괴된다며 도롱뇽을 원고로 소송까지 제기(도롱뇽 원고는 기각)하면서 극구 반대했다. 공사가 지연되고 상당한 혈세를 허비한 뒤 2010년에 공사가 끝난 결과는 당초의 환경영향평가대로 도롱뇽 등 생태계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환경단체들의 반대로 몸살을 앓은 끝에 겨우 완공돼 수도권 북부지역 교통난 완화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도 마찬가지 경우다.

그러나 국토부가 반드시 명념해야 할 게 있다. 환경 보존 도그마에 대처한다고 해서 오로지 개발에 중점을 두는 개발 논리에 너무 함몰돼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오염시키는 난개발이나 무차별적인 개발은 절대 안 된다. 국민이 환경과 개발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2년 4월 6일 금요일

랜드마크 신드롬을 넘어서 (충남사설읽기워크북08)

우리 지역의 랜드마크는 무엇이라고 생각나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관한 글을 찾아 읽으면서 '부럽다'라는 생각과 함께 들었던 몇가지 생각 중 하나입니다. 또 이런 기사도 생각이 나네요...
133층 상암 랜드마크 타워 건설 무산되나 
여러가지로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게 해주는 글입니다. 내용이 어려울 것 같진 않구요, 다만 '구겐하임 미술관'이니 '빌바오'니 하는 고유명사들이 생소할 것 같네요. (그래서 열심히 링크를 달았습니다... 한 번씩 꾹꾹 눌러주시길 ^^)
다시 한 번, '우리 지역의 랜드마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워크북의 마지막 질문을 그대로 이 곳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네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건조물 혹은 공간을 적고, 그 이유를 서술해 봅시다."






한겨레 2011.05.27. 김정후

 구글에 영어로 ‘landmark’를 입력하면 약 9000만개, 한글로 ‘랜드마크’를 입력하면 약 1200만개의 결과가 검색된다. 한 단어에 대한 결과로는 놀라운 수치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최근 건립된 주요 건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랜드마크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야말로 ‘랜드마크 신드롬’이라 부를 만하다.

  랜드마크(클릭)란 옛날에 탐험가가 자신이 지나간 길을 쉽게 돌아오려고 남겨 놓은 표지이다. 이 개념이 도시계획가에 의해 특정 도시와 장소를 상징하는 건조물과 공간을 일컫는 말로 진화했다. 도시는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을 넘어 추억과 흔적이 누적되는 장소이다. 랜드마크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공유하도록 만들며, 도시의 정체성과 차별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핵심적 구실을 한다. 사회학자 제인 제이컵스(클릭)는 적절한 랜드마크가 심리적 측면에서 편안한 마을과 거리를 구성하는 데 공헌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가지 더 추가하면 랜드마크는 선명한 도시 브랜딩(클릭)을 통해 도시가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는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랜드마크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언론을 통해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완공된 무슨 건물이 랜드마크로 급부상해 도시를 확 바꾸어 놓았다”는 식의 선정적(클릭) 소식이 쏟아진다. 연이어 비슷한 모습의 시각적 자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세울 만한 랜드마크 몇개쯤 갖지 못한 도시는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어디 이뿐인가. 예외적이지만 스페인의 빌바오(클릭)나 오스트리아의 그라츠(클릭)와 같이 무명이었던 도시가 랜드마크로 인해 단숨에 세계 관광지도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는 사실은 가시적 성과에 목마른 도시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랜드마크를 향한 어설픈 열정은 높이, 규모, 형태, 이름값 그리고 문화시설을 통한 랜드마크 창조라는 가장 낮은 수준의 방식을 반복적으로 채택하는 우를 범하게 한다. 사회학자 레슬리 스클레어는 형식만 다를 뿐 오늘날에도 옛날의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힘과 권력을 과시하려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랜드마크를 짓는다고 비판한다. 언론에서 성공한 랜드마크로 칭송하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클릭)과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클릭)을 보자. 빌바오시와 시민 그리고 기업이 도시 재생을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치열하게 논의하고 어떻게 비전을 수립하여 일관되게 실행했는지, 테이트 모던을 위해서 테이트재단이 어떤 전략을 수립했고 런던시는 균형발전을 위해서 어떻게 지원했는지를, 이들을 벤치마킹한다는 도시들이 살핀 적이 있는가. 이면에 담긴 노력을 애써 외면한 채 파격적 모습의 결과물이 도시를 바꾼다는 유치한 수준의 상업적 주장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가장 쉬운 방식으로 랜드마크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랜드마크를 복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검증된 세계적인 대가로 하여금 비슷한 수준의 건물을 짓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랜드마크 효과’까지 복제되지 않는다.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하고,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과 무관하며, 급조된 빈곤한 상상력을 통한 결과물이 대가의 손을 거친다 한들 한 도시를 상징하고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랜드마크로 탄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21세기 들어서 랜드마크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시행된 프로젝트 중에서 현재 랜드마크로 인정받는 사례는 또한 얼마나 있나.

  도시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인 오늘날, 랜드마크 신드롬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것이다. 진정으로 도시를 빛낼 랜드마크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을 위한 ‘스토리’와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하여 랜드마크 신드롬이 한순간의 유행에 머물지 않고 도시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랜드마크 효과를 낳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랜드마크를 향한 낭만적 동경이 아니라, 이성적 통찰이다.

비정한 오디션 프로그램들 (충남사설읽기워크북07)

작년 한 해를 떠들썩 하게 했던 <나는 가수다>, <위대한 탄생>, <슈퍼스타K> 등등 오디션 또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한 글입니다. 떠들썩한 만큼 많은 글들이 나왔는데요, "나는 가수다"에 대한 블로그 검색 결과만도 63만개 가 넘게 나오니(클릭)  그 정도가 어땠는지 짐작이 가죠? 
그런 점에서 보면 매우 평이하고 평범한 구조의 글입니다. 오디션과 경쟁적 사회분위기를 이어 놓고 '경쟁'보다는 '진정성'을... 이라고 말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요.
비슷한 글로 <'서바이벌 예능’ 우울한 시대의 초상>(클릭) 도 읽어봅시다. 이 글과 논지는 비슷하나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른 글인데요, 어떤 글이 좀 더 와닿나요?





한겨레 2011.05.13. 김원태

<슈퍼스타케이>가 성공한 이후 방송사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유행하고 있다. 문화방송은 <나는 가수다>, <위대한 탄생> 등 가수 대상 프로와 아나운서를 뽑는 <신입사원>을 방송중이다. 한국방송은 아마추어 밴드를 대상으로 한 <톱밴드> 프로그램의 참가 신청을 받고 있고, 에스비에스는 탤런트를 대상으로 하는 <기적의 오디션>을 6월부터 방송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유행은 신자유주의(클릭)하에서 줄세우기와 무한경쟁을 시키며 패자를 ‘왕따’시키는 오늘날의 사회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무한경쟁은 교육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고 어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언론사에서 고교별 일류대 합격자를 발표하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대학과 학과를 상·중·하위권으로 나누어 대학 지원의 지침으로 제공하는 것도 줄세우기의 전형이다.

방송사들이 다투어 오디션 프로그램을 채택하는 것은 출연자들을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으로 줄세우기 해서 그들을 극적으로 탈락시키면서 긴장감을 높여 시청률을 높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가수>의 경우 요즈음 노래와 가창력 위주로 방송하니까 매번 탈락자들을 가리던 때보다 음악에 대한 몰입도가 커지고 시청률도 더 높아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음악 프로그램은 기존 가수들이 출연하기 때문에 탈락해도 가수 신분이 유지되므로 큰 타격이 되지는 않지만, <신입사원>의 경우는 사원이 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이들과 처지가 다르다. 아나운서를 이러한 탈락 경쟁으로 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나운서는 방송사의 얼굴임과 동시에 바르고 고운 말을 쓰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가 쓰는 말은 국민 언어생활의 표준이요 모범이다. 그런데 <신입사원>에서는 그런 사람보다는 재치 있는 사람, 순발력 있는 사람, 재주가 많은 사람을 뽑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아나운서라기보다는 연예인이나 엠시(MC)에 더 가깝다.

상업성을 위해 억지로 서바이벌 방식을 적용하다 보니 무리도 따른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시청자 투표나 방청객 투표가 없이 아나운서들로 이루어진 몇몇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전담하기 때문에 오디션 프로그램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영향력과 결정권이 가장 크다. 그들은 응시자들에게 가혹하고 비정한 질문을 퍼붓고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응시자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응시자들이 당황하고 실수하고 진땀 흘리는 장면들이 불합격 사실과 함께 웃음거리로 공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론권력의 횡포이며 초상권(클릭) 침해와 명예훼손, 인격권(클릭) 훼손에 해당되는 중대한 인권침해 사항이다. 또한 팀별 경쟁에서 탈락한 팀에서 재심사를 통해 다시 일부를 구제하고 나머지 응시자들을 또 탈락시키는 등 붙였다 떨어뜨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탈락자들을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하는 가혹하고 비정한 모습으로 비친다.

나날이 도가 심해져 가는 무한경쟁과 줄세우기가 방송 프로그램에까지 반영돼 탈락자와 패배자를 비참하게 만들기보다는 연민(클릭)의 정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한다. 살벌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살인적 경쟁을 멈추고 진정성(클릭)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2012년 4월 5일 목요일

대학과 자살에 대한 생각 (충남사설읽기워크북06)

작년 이맘 때, 나라 전체를 슬프게 했던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쇄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한 글입니다. 하지만 그 연쇄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만 했을 뿐 실제 내용은 '인문학의 필요성'에 관한 글이라 할 수 있겠네요.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쇄 자살사건이 궁금한 친구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교수도 자살... 충격에 빠진 카이스트 전면 휴강 (SBS)
자살 또 자살, 공짜없는 카이스트는 지금 (프레시안)
"인문학을 통해 고통을 이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 주장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인문학'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좀 알아봐야겠죠?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하기엔 지금 이 자리가 충분치는 않을 것 같고요... 대강 아래의 백과사전 인용글 그리고 링크에 걸린 동영상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살펴보았으면 해요...
인문학(人文學)은 인간의 조건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
인문학의 분야로는 철학과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 음악, 신학 등이 있으며, 크게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로 요약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인문학'(클릭) 에서)
인문학과 안내 동영상 (클릭)
지금 이 글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또 '인문학의 위기'라는 얘기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야하는데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돈이 되는 것', 취직이나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쫓는 요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과 같은 바로 돈으로 이어지지 않는 공부, 학문들은 소외되고 있는 현상을 말해요.
인문학을 소외 시키는 극한적인 경쟁이 사람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문학과 자살을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있는 글쓴이의 생각이 이해가기도 하지요?
한편으로는 당장 경제적 불안과 경쟁 속에서 자살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 '마음 둘 곳' 정도나 얘기하는 것이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리기도 하고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이 것 저 것 알아야할 것이 많은 내용이라 다른 글에 비해 좀 더 어렵기도 할 거에요. 하지만, 일단 지금 현재 위치에서 생각이 드는 것, 할 수 있는 것 만큼이라도 한 번 나누어 봤으면 좋겠네요. 그럼~ ^^ 
 


한겨레 2011.04.15. 조성우

'영재 학교' 카이스트(클릭)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을 한데 이어 존경 받던 교수까지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정신적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지이후(知止而后) 유정(有定) 유정이후(有定而后) 능정(能靜) 능정이후(能靜而后) 능안(能安) 능안이후(能安而后) 능득(能得).' 머물 곳을 알아야 정해짐이 있고, 정해져야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해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해야 생각할 수 있으며, 생각해야 얻음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머물 곳은 마음의 거처를 뜻한다. 몸이 고통스럽고 고달픈 곳에 머물러도 마음은 그에 시달리지 않고 평화롭고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지혜이고, 지혜는 고통스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뿌리이다. 마음의 거처를 현실의 변화하는 사물이나 상대적인 가치에 두게 되면, 마음의 거처는 몸의 거처와 혼잡하여 고요함과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 돈과 명예, 권력과 지위는 변화하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가치들에 마음이 머물게 되면 마음은 고요함과 편안함이 아니라 언제 떠날지 모르는 불안함과 놓칠 것 같은 안타까움과 조바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과 종교는 현실을 초월한 자리에 마음의 거처를 찾는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현실을 동굴에 비유하고 동굴에 갇힌 죄수에 인간의 운명을 비유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동굴이란 몸의 거처이다. 동굴의 바깥에 있는 참된 실재에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동굴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목표를 달성해야 성공한 인생이다, 과학 영재와 예술 천재들을 배출해 국가 발전에 기여하자는 주장과 생각은 우리의 몸과 두뇌가 사는 동굴이다. 편협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문화의 불가피한 흐름이다. 경쟁도 좋고 강인한 목표의식과 도전정신도 좋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마음을 관리하여 정신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유지할 수 있는 공부가 병행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현실의 가치에 마음이 혼잡하여 함께 돌아가지 않게 해야 한다. 고통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퇴계 이황(클릭)은 "근심 속에 즐거움(樂)이 있다"고 가르친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현실로부터 마음을 분리하여 편안함과 고요함을 유지하려는 초월의 욕구도 함께 극을 향한다.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은 고통스런 현실이 아닌 곳에서 머물 곳을 찾는 법이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이 커질수록 인문학에 대한 욕구도 함께 커진다.
<대학>(클릭)은 그 다음에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終始) 지소선후(知所先後) 즉근의(則近矣)'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선후가 있어 그것을 알면 도에 가깝다는 뜻이다.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말단을 다스릴 수 없기에, 공자는 박해야 할 때 후하고 후해야 할 곳에 박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과학 영재건 예술 천재건, 학교의 존립과 교육 목적에 상관없이 무릇 인간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인문학은 배제할 수 없는 기본이어야 한다. 고통스런 경쟁과 목표를 향한 도전 정신이 카이스트에 진학한 학생들의 선택이요 학교가 내건 개혁의 방침이라면, 고통을 이기는 법도 함께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인문학의 지혜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12년 4월 2일 월요일

외규장각 도서 '대여'가 아쉬운 이유 (충남사설읽기워크북05)


'문화재 반환(click)'이라는 이슈에 대한 글입니다. 단순하게만 보자면 이런 '나쁜 놈들! 훔쳐간 것을 제 것인양 하다니'라며 분개 할 일이지만, 어느 것이나 그렇듯이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습니다. 특히나,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앉은 역사적 사안에 대해서는요.

'의궤'와 관련 된 상식은 당연히 채워야겠지요?



이런 글도 읽어보면 조금 더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탈문화재,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오타니컬렉션반환추진위, 한국 소유 해외문화재 반환 시동(click)


여러분의 워크북에서는 '어떻게 하면 의궤와 같은 해외 반출 문화재를 환수 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여기서는 조금 다른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봤으면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댓글로 달아주었으면 좋겠네요 ^^;)

  • '문화재'는 과연 누구의 '소유'라고 해야할까요? - '의궤' 같은 경우는 좀 단순한 편이지만, 지금은 중국 땅인 만주에 있는 고구려의 유물 같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혹은 마야문명의 유물과 같은 멸망하여 후손이 남지 않은 이들의 문화재는 누구의 것이 되는 것이 맞는 걸까요?





외규장각 도서 '대여'가 아쉬운 이유
한겨레 2011.04.14.
어제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도서 1차분 75권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조선왕실의궤(의궤) 340권을 약탈해 간 지 145년 만이다. 조상의 삶과 얼이 새겨진 문화유산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번 외규장각 도서의 귀국을 그저 반길 수만은 없다. 우선 외규장각 도서는 ‘반환’이 아니라 ‘5년 대여’라 아쉬움이 크다. 한국-프랑스의 의궤 관련 합의문을 보면, 의궤는 5년 단위로 대여를 하고 이후 새롭게 대여를 갱신하게 돼 있다. 정부는 그동안 “사실상의 영구대여여서 반환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해 왔는데, 합의문에는 영구대여로 해석될 만한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어제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제적인 관례를 고려한, 한국으로의 실질적인 반환”이라고 강조했다. 혹시 정부가 제 공치사를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프랑스가 의궤 이외의 다른 약탈물에 대해선 반환 요구를 할 수 없도록 못박은 것도 문제다. 합의문은 ‘의궤들의 대여는 유일한 성격을 지니는 행위로서 그 어떤 다른 상황에서도 원용될 수 없으며, 선례를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로서야 이번 의궤 대여가 자신들이 외국에서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의 반환 요구에 영향을 주어선 안 된다는 뜻이겠지만, 우리로선 5년 뒤의 대여 갱신이나 다른 약탈유물들을 생각할 때 아쉬움이 남는다. 제3의 기관에서 전시 목적으로 한 권이라도 대여를 요청할 경우 프랑스와 협의를 해야 한다는 조항도 제약의 소지가 있다.
정부는 돌아온 의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전시 계획과 함께 긴 안목의 영구반환 전략을 세워야 한다. 아울러 외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환수에 적극 나서야 한다. 확인된 것만도 14만여점의 문화재가 이국땅에서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지 않는가. 




원전과 화수분 (충남사설읽기워크북03)


경향신문 2011.03.25


무진장한 공급원을 가리키는 말이 ‘화수분’이다. 하수분(河水盆)이 어원이라 한다. 중국 진시황 때 황허(黃河)의 물을 채운 거대한 물동이가 있었는데 얼마나 컸던지 마르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중국에선 ‘쭈바오펀’(聚寶盆, 보배를 늘리는 그릇), 영어권에선 성경에서 유래한 ‘과부의 항아리’(widow’s cruse)란 말이 쓰인다. 요즘 말론 ‘돈 찍어내는 기계’(money printing machine)쯤 된다. 석유시대 이후를 걱정하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은 원자력발전을 에너지의 화수분이라고도 한다.

위기(危機)란 위험한 고비란 뜻이다. 한자를 뜯어 보면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잇닿아 있다. 그래서 위기가 곧 기회라고도 한다. 위기를 뜻하는 영어 ‘crisis’의 그리스어 어원은 ‘sift(체로 거른다)’다. 본질을 취하고 쭉정이를 걸러낼 때란 의미다. 생태경제학의 토대를 닦은 크로퍼드 스탠리 홀링이 말하는 ‘복원력’(resilience)이 그렇다. ‘보존-해방-재조직-개발’의 순환 단계마다 위기가 닥치는데, 창조적 파괴가 이뤄지지 않으면 생태계는 복원력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하리 레만 독일 환경청 지속가능전략국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원전이 원전업계의 화수분일 뿐이라고 했다. 원전은 인류의 화수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원전 사고 직후 탈(脫)원전을 선언한 독일의 목표는 2017년까지 무(無)원전이다. 소설이 아니다. 느닷없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독일은 전체 생산전력의 1%이던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15년 만에 17%로 늘렸다. 그 힘은 탈원전에 대한 80%의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 합의에서 나왔다고 레만 국장은 말한다. 원전은 화수분이란 환상에서 언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본 원전 사고는 분명 위기다. 우리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위험이 기회를 압도하는 반쪽의 위기라는 점이다. 내진설계는 괜찮은지, 편서풍이 변덕을 부리지나 않을지, 일본 명태가 동해로 헤엄쳐 오지나 않을지 불안만 가득하다. 그래서 독일의 탈원전은 남의 일로 치부된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자 탈원전 시동을 건 독일은 이번 일본의 위기에서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창조적 파괴의 기회를 포착했다. 일본 원전 위기는 우리에게 독일의 사례야말로 남의 일이 아님을 일깨우고 있다.

독도, 환경보다 영토관리가 먼저다 (충남사설읽기워크북04)




일본 교과서 파동 이후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높이기 위한 조치들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독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과 방파제 건립이다. 군 주둔과 관련해서는 김황식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현실적인 면에서 경찰 주둔이 적절하지만, 상황전개에 따라 강력한 군대가 주둔하는 방안도 검토할 가치가 있다.”라는 입장으로 정리됐다. 이 문제는 오는 8월 일본이 ‘방위백서’에 또다시 독도 영유권을 명기한다면 다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은 방파제 건립이다. 부처 간 이견이 큰 사안이다. 사업을 주관하는 국토해양부는 2013년부터 방파제 건설에 들어가겠다는 기본계획을 최근 재확인했다. 4,0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독도 선착장 바깥쪽에 길이 295m의 방파제를 축조해 배가 안정적으로 정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75%선에 머물고 있는 선박접안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여기에 대한 다른 부처의 주장은 유약하고 옹색하다. 환경부는 “독도는 ‘암석학의 보고’라 불릴 만큼 지질학적 가치가 높다.”라며 수중 건조물 설치에 신중한 입장이다. 문화재청은 독도가 1999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사실을 상기하며 “방파제 설치로 입도(入島) 인구가 늘어날 경우 경관이 훼손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독도는 무엇보다 영토 관리의 가치가 앞서야 한다. 독도의 해저환경도 중요하지만 한려수도를 보전하는 것과 같은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천연기념물의 가치도 그렇다. 평화 시라면 독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공들여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국토 보전의 문제와 충돌할 경우 하위가치로 물러서야 한다.

부처 간 이견은 자칫 상대국의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일본이 교과서와 방위백서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대놓고 억지를 부리는 마당에 환경 훼손과 문화재 보호 등의 이유로 부처 간 이견을 노출할 경우 국토 보전의 의지가 약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 (         )은/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방파제 건립 사업을 강력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2012년 4월 1일 일요일

스마트폰 시대의 고독 (충남사설읽기워크북 02)

동아일보 2011.03.19 황상민



얼마 전 몇몇 광고 캠페인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에만 빠져 들지 말고 여친에게도 빠져 드세요.”

“운전 중 SNS 날리려다 응급차 SOS 날리게 됩니다.”

“페이스북만 들여다보지 말고 주위 사람 얼굴도 돌아보세요.”

응급차 관련 문구는 뒤통수를 때리는 듯했다. 사람들을 연결하고 통하게 만든다는 스마트 기기에 의해 정작 사람들 간의 소통이 단절되거나, 더욱 소외되는 그런 상황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연결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는 외로움과 혼자만의 생활 속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서 정말 스마트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스마트폰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실시간 e메일 확인과 응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됐다. 이로 인해 사람들 간의 소통은 더 빨라지고,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된 듯하다. 그러나 정작 나는 사람이 아닌 스마트폰을 쥐고 산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더 줄고 있다. 친구와 만나도, 가족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앉는 순간에도 각자의 스마트폰 세계에 빠진다. 소통을 촉진하고 만남을 더 자연스럽게 한다는 스마트폰이 대화의 부재, 소통의 단절 문제를 야기한다. ‘스마트폰 과부’, ‘스마트폰 홀아비’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으로 인해 세상과의 소통은 용이해졌지만 가족 간의 소통은 오히려 단절돼 가는 것은 아닌지 씁쓸함마저 든다.

디지털 기기, 스마트 기기가 축복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고민하게 만든다. 현재의 삶을 더 스마트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줄 훌륭한 수단이지만 스마트 기기의 가치는 이것을 이용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행복한 삶을 돕는 수단으로 등장한 스마트폰으로 매 순간 SNS를 하고 수천 명의 팔로어를 거느렸다고 해도 당장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문자나 SNS를 통해서가 아닌, 거리낌 없이 전화를 걸고 얼굴을 마주 할 상대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역시 궁금하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 행복까지 가져왔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스마트한 삶을 위한 스마트한 활용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최신 디지털 기술과 제품을 자랑하는 가전회사들이 정작 제품이 아닌 인간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아날로그적인 삶을 즐기자는 캠페인은 소비자로선 또 다른 신선한 충격이다. 광고 캠페인 하나로 디지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보고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스쳐 보내는 삶이 아닌, 스마트 기기를 통한 진정 스마트한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본다.

2012년 3월 31일 토요일

몇 살부터 노인인가 (충남사설읽기워크북 01)

동아일보 2011.01.04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인 미국의 피터 드러커는 96세로 숨질 때까지 왕성한 저작활동을 했다. 올해 90세인 헬렌 토머스 기자는 지난해 허스트뉴스서비스사에서 퇴직하기 전까지 49년간 백악관을 출입했다. 대법관은 종신제이고 테뉴어 교수들도 건강과 지성이 허락할 때까지 강단에 선다. 퇴직 연령이 따로 없는 미국 전문직 노인들의 활기찬 모습이다.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 박상철 소장은 11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열린 ‘고령자란 심포지엄’에서 “노화는 비가역적(非可逆的)이고 불가피한 변화가 아니라 가역적이고 능동적 변화”라고 정의했다. 요즘 60대는 노인이라고 명함을 내밀기도 어렵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한국 남자의 평균 기대수명은 77세, 여자는 83.8세다. 40년 전인 1970년보다 18.6세 늘어났다. 현재 40세는 90세까지는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다.   


노인의 기준이 65세로 정해진 것은 평균 기대수명이 50세 미만이던 19세기 후반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 때다. 당시 65세면 지금의 90세에 해당된다고 박재갑 국립중앙의료원장은 설명한다. 노인의 건강연령이 젊어지고 평균수명은 늘어나는데도 법과 제도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 퇴직연령은 55∼60세에 맞춰져 있고 노령수당 지하철무임승차 등 각종 혜택도 65세에 맞춰 시작된다. 심지어 국민연금 수급연령은 60세다. 신체 건강하고 일할 의지도 있는데 65세 이상이라고 부양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적 재앙을 예비한다. 노인을 부양하는 청년층 부담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나이를 기준으로 노인을 규정할 것이 아니라 미국처럼 신체적 정신적 시대적 사회경제적 요인을 포함한 새로운 평가기준이 나와야 한다. 평균 기대수명이 80.5세(2009년 기준)인 시대에 65세를 노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다. 일률적인 퇴직연령을 없애고 개인차를 반영한 탄력적 복지제도가 필요하다. 부자에게까지 무상급식 무상의료를 제공할 게 아니라 노인들이 더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다. 노인을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사회참여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짜야 한다. 


㉠노인이란 용어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지만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미국에서는 노인을 ‘시니어 시티즌(Senior Citizen)’이라고 부른다. 시니어라는 말엔 풍부한 경륜이, 시티즌이라는 말에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2018년이면 우리도 65세 이상 인구가 14%에 이르는 고령사회에 들어간다. 되돌릴 수 없는 고령화의 물결 앞에서 노인 개념을 새로 정립해 사회경제적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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